[남원여행] 지리산 실상사

Posted by 누리나래
2012. 3. 8. 14:35 여행

 지리산 실상사는 대부분의 오래된 사찰들이 깊은 산중에 자리 잡고 있는것과 달리 사방에 반야봉, 달궁 등 명산이 병풍처럼 들러쳐진 한 가운데 분지로 조성된 들판의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습니다.

지리산 자락에는 화엄사, 천은사, 쌍계사, 대원사, 단속사, 법계사, 영원사, 벽송사, 연곡사등의 명찰들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중 평지에 자리한 사찰은 단속사와 실상사가 있는데 이중 단속사는 폐허가 되어 석탑만 남아 있다고 합니다.

천년사찰, 호국사찰로 잘 알려진 실상사는 신라 흥덕왕(興德王) 3년(서기 828년) 증각대사 홍척(洪陟)이 당나라에 유학, 지장의 문하에서 선법(禪法)을 배운 뒤 귀국했다가 선정처(禪定處)를 찾아 2년동안 전국의 산을 다닌 끝에 현재의 자리에 발길을 멈추고 창건했다고 전합니다.

지리산 실상사 천왕문

지리산 자락의 많은 사찰중에서도 실상사는 단일 사찰로는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으며 신라말 구산선문(九山禪問) 가운데 최초의 선문이기도 합니다

실상사 철불

천년 세월을 보내오면서 호국사찰로 알려진 실상사에는 유독 일본, 즉 왜구와의 얽힌 설화가 많이 전해진다. 과거 사찰의 전소원인을 정유재란 당시의 왜구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는 부분에서도 일본과 관련된 전설을 엿볼 수 있습니다.

또한 약사전의 약사여래불은 천왕봉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천왕봉 너머에는 일본의 후지산이 일직선상으로 놓여져 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가람배치도 동쪽을 향해 대치형을 하고 옆으로 강이 흘러 대조적입니다.

이 절에는 "일본이 흥하면 실상사가 망하고 일본이 망하면 실상사가 흥한다"는 구전이 있는데 이는 천왕봉 아래 법계사에서도 전해지고 있어 흥미를 끈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실상사 경내의 보광전 안에 있는 범종에 일본 열도의 지도가 그려져 있는데 스님들이 예불할 때마다 종에 그려진 일본열도를 두들겨 치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 우리나라와 실상사가 흥하면 일본이 망한다는 구전에 의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스님들이 이 속설에 따라 범종의 일본지도를 많이 두드린 탓에 범종에 그려진 일본지도 중 훗카이도와 규슈지방만 제 모양으로 남아 있을 뿐 나머지 열도는 희미해져 가고 있으며 최근의 독도 영유권에 대한 일본의 망언이 있는 오늘날 한일관계를 두고 볼 때 보광전의 범종에 얽힌 사연이 갖는 의미는 우리에게 많은 점을 일깨워주기에 충분하다고 보여집니다.. 이 같은 전설과 구전들을 살펴볼 때 실상사는 일본에 대한 호국사찰이며 불교문화의 큰 도량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실상사 약사전 철부처님이 일본으로가는 지기를 막고 있다고 여겨 일제강점기때 일본인들이 부처님의 팔을 잘랐다는 속설이 전해진다. 부처님의 오른팔은 최근 복원한것입니다. 약사전은 현재 복원공사중으로 해체되어 있습니다.

실상사 수철화상 능가보월탑

 ▲  실상사 수철화상 능가보월탑 (實相寺 秀澈和尙 楞伽寶月塔)

실상사 안에 있는 극락전을 향하여 그 오른쪽에 서 있는 탑으로, 수철화상의 사리를 모셔 놓은 사리탑이다. 수철화상은 신라 후기의 승려로, 본래 심원사(深源寺)에 머물다가 후에 실상사에 들어와 이 절의 두번째 창건주가 되었다. 진성여왕 7년(893)에 77세로 입적하니, 왕은 그의 시호를 ‘수철화상’이라 하고, 탑 이름을 ‘능가보월’이라 내렸다고 합니다.

탑은 신라 석조부도의 전형적인 양식인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아 맨 아래 바닥돌에서 지붕까지 모두 8각을 이루고 있습니다.

기단(基壇)은 아래받침돌에 구름과 용무늬와 사자가 새겨져 있으나 마멸이 심하다. 윗받침돌에는 솟은 연꽃무늬가 삼중으로 조각되어 둘러져 있고 8각의 탑몸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고, 각 면에는 문(門) 모양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새겨져 있습니다. 지붕돌은 얇고 경사가 완만하며, 처마부분에는 엷은 곡선을 이루고 서까래를 새겼다. 지붕 경사면에는 기와골을 표시하였고, 그 끝에는 막새기와까지 표현함으로써 목조건축의 지붕 양식을 충실히 모방하였다. 꼭대기에는 몇 층의 단이 있고, 그 위에 원형이 작은 돌에 있을 뿐 모두 없어졌습니다.

탑 옆에는 탑비가 건립되어 있어서 이 부도의 주인공을 비롯한 여러 관련된 내용을 알 수 있다. 비문에 의하면, 수철화상이 진성여왕 7년(893)에 입적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탑을 세운 시기를 이 즈음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실상사 석등

▲실상사 석등 (實相寺 石燈)

석등은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밑에 3단의 받침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는데, 평면은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받침부분의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8장의 꽃잎을 대칭적으로 새겨져있습니다. 화사석은 8면에 모두 창을 뚫었는데, 창 주위로 구멍들이 나 있어 창문을 달기 위해 뚫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지붕돌은 여덟 곳의 귀퉁이가 모두 위로 치켜올려진 상태로, 돌출된 꽃모양 조각을 얹었고 머리장식에는 화려한 무늬를 새겨 통일신라 후기의 뛰어난 장식성을 잘 나타낸다고 할수 있습니다.

이 석등은 규모가 커서 석등 앞에 불을 밝힐 때 쓰도록 돌사다리를 만들어 놓았으며, 지붕돌의 귀퉁이마다 새긴 꽃모양이나 받침돌의 연꽃무늬가 형식적인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보인다.

석등앞에는 등을 켜고 끌때 올라갈수 있도록 돌사다리는 국내에 이곳 실상사 한곳 뿐이라고 합니다.

실상사 삼층석탑

▲실상사 3층석탑

실상사의 중심법당인 보광전 앞뜰에 동·서로 세워져 있습니다. 실상사는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洪陟)이 창건하였으며 풍수지리설에 의거하여, 이 곳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간다 하여 지은 것이라 한다. 이 곳에는 3층 석탑 이외에도 석등, 묘탑, 탑비, 부도, 철조여래좌상 등이 있어 유명하다.

탑은 2층으로 된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동서 두 탑 모두 탑의 머리장식이 거의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희귀한 예이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져 통일신라시대의 정형을 보이며,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처마밑이 수평이며, 밑면의 받침은 4단이고,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는데, 그 정도가 부드러우면서도 경쾌하다. 특히 탑의 머리장식은 원래대로 잘 보존되어 각 장식부재들이 차례대로 올려져 있다.

이와 같이 두 탑은 규모나 양식이 같아서 동시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대작은 아니지만 돌의 구성이 정돈되어 있는 통일신라 후기의 뛰어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실상사 보광전

 ▲ 실상사의 중심이 되는 법당인 보광전입니다.
선종 사찰답게 단청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실상사 삼층석탑과 석등

▲ 삼층석탑과 석등.
  실상사는 깊은 산중임에도 분지에 자리잡고 있어 깊은 산속의 절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연지

▲ 수철화상능가보월탑 앞에 조성되어 있는 연지

반송

▲ 반송이라는 소나무.
  작은 반송은 봤지만 이렇게 큰 반송은 처음 보는듯 합니다.

실상사 와편

▲ 실상사 발굴조사중에 출토된 기와 조각들은 한곳에 모아놓아 탑처럼 쌓아두었습니다.

실상사 범종각

▲ 범종각입니다.
  
이밖에 실상사는 친화경화장실(생태 뒷간)이 많이 알려져 있죠.
생태뒷간은 이전에 포스팅한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남원 실상사 생태 뒷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