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수록 매력이 넘치는 익산 고도리 석불입상(보물 제46호)

Posted by 누리나래
2011. 11. 28. 15:36 여행

고도리 석불입상(보물 제46호)

볼수록 매력이 넘치는 익산 고도리 석불입상(보물 제46호)

고도리라고 하면 누구나 고스톱 칠 때 고도리를 떠올리지만 고도리는 지명이다.

고도리(古都里)라는 지명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옛 도읍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고도리 석불입상은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유적지와 4차선 1번 국도를 건너편에 마주하고 있는 2구의 석불입상으로 미륵사지와도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을 뿐더러 논산에서 전주로 가는 고속화도로가 왕궁리 유적과 석불을 갈라놓기는 했지만 왕궁리 유적과 아주 무관해 보이지는 않는다.

인터넷이나 자료사진으로 보던 것과는 달리 주변은 온통 비닐 하우스로 덮여있고 들판 한 가운데를 지나는 작은 수로를 마주하며 200m정도의 거리를 두고 마주 서있는 입상은 보관을 쓰고 있는 모습 등으로 볼 때 개인적으로는 미륵불상이 아닌가 생각된다.

인근에 우수한 석재 산지인 황등과 가까워 질 좋은 석재와 우수한 석공을 보유하게 된 것도 미륵사지 석탑이나 왕궁리 5층석탑, 연동리 석불좌상과 같은 훌륭한 석조유적을 만들게 된 배경이 됐을 것이다.



문화재청 자료와 안내판에 의하면

“머리에는 4각형의 높은 관(冠) 위에 다시 4각형의 갓을 쓰고 있다. 4각형의 얼굴에는 가는 눈, 짧은 코, 작은 입이 간신히 표현되어 있는데, 토속적인 수호신의 표정이다. 목은 무척 짧게 표현되어서 어깨와 얼굴이 거의 붙어 있는 셈이다.

몸은 사다리꼴의 돌기둥으로 굴곡이 없으며, 팔은 표현되지 않고 손이 간신히 배에 나타내었다. 도포자락 같은 옷은 특별한 무늬 없이 몇 줄의 선으로 표현하였다. 대좌(臺座)와 불상을 같은 돌에 새겼는데, 앞면을 약간 깎아 대좌 같은 모양을 만들고 있다.

사다리꼴의 돌기둥 같은 신체나 비사실적인 조각수법이 마치 분묘(墳墓)의 석인상(石人像)과 비슷하다. 고려시대에 이르면 신체표현이 지극히 절제된 거대한 석상이 많이 만들어지는데 이 불상 역시 그러한 작품 중의 하나로 보인다고 한다” 되어있다.

고도리 석불입상(보물 제46호)

고도리 석불입상에 전해져 오는 전설

고도리 석불입상에는 2개의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그중 하나는 이 석불입상은 각각 남자와 여자인데, 평소에는 만나지 못하다가 음력 12월 돼지날인 해일 자시(밤 12시)에 옥룡천이 얼어붙으면 서로 만나 1년 동안의 회포를 풀다가 새벽에 닭이 울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진다.

또 하나의 전설은 이 석불들이 넘어져 있던 것을 1858년 조선 철종 9년에 익산 군수로 부임해 온 최종석이 지금의 위치에 일으켜 세웠다고 한다. 그 때 이 석불을 새로 일으켜 세운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석불중건비를 세웠는데, 지금 도로 가까운 쪽에 서 있는 석불 옆에 세워져 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금마는 익산의 옛날 읍이 있던 자리로 동ㆍ서ㆍ북 3면이 모두 산으로 막혀 있는데, 유독 남쪽만은 터져 있어, 물이 다 흘러나가 허허하게 생겼기에 읍 수문의 틈을 막기 위해 세워진 것"이라 한다.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금마의 주산인 금마산의 모습이 마치 말의 모양과 같다고 하여, 말에는 마부가 있어야 하므로 마부 역할을 할 사람 모양의 석상을 세웠다고 한다."라고 하여 이 석불이 세워지게 된 배경에 대해 두 가지 전설을 전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전설은 결국 금마면의 풍수 지리적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2기의 석불을 세웠음을 말해 주는 것으로, 풍수 지리 사상과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긴 기둥 같은 몸체에 네모난 얼굴, 가는 눈, 짧은 코, 옅은 웃음기를 담은 작은 입 등의 모습에서 '마부 역할을 할 사람 모양의 석상을 세웠다.'는 전설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두 석불은 불상에서 느낄 수 있는 근엄함보다는 소박함과 친근함을 느끼게 하므로, 오히려 마을을 지켜주는 장승과 비슷해 보인다. 이 2기의 석불에 이렇게 다양한 전설이 전해져 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고려 시대에는 이러한 거대한 석상들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이 석불 또한 그러한 작품 중의 하나이며, 당시 지방에서 유행하고 있던 불상 양식을 보여 주는 작품으로도 볼 수 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왕궁리 유적지가 예사 마한의 도읍지 였다면 이 석불입상은 도읍의 입구에 세워진 장승같은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강하게 든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푸근하게 생긴 모습이 매우 친근하고 화려한 조각보다는 투박한 아름다움이 친 서민적이라는 생각이 들게한다.

보면 볼수록 매력있는 석불입상이다.

고도리 석불입상(보물 제46호)

고도리 석불입상(보물 제4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