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여행 - 익산 쌍릉 사적 87호

Posted by 누리나래
2011. 12. 9. 15:05 여행

익산여행 - 익산 쌍릉 사적 87호

사적 제 87호로 지정되어 있는 익산쌍릉입니다.
전북 익산시 석왕동에 있는 2기의 능으로 경주의 왕릉에 비해서는 작은 규모입니다. 익산 쌍릉의 발굴 당시 높이는 3.1m, 양 무덤의 너비는 약 0.5km였지만 현재는 보수되어 대왕묘의 지름은 30m, 높이는 5m, 소왕묘의 지름은 24m, 높이는 3.5m입니다.

익산쌍릉 주변에는 서동공원과 같이 만남의 광장, 사랑의 정원, 사랑의 나무심기, 오감생태공원등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서동과 선화공주에 대한 설화조각상, 수변정원, 선화광장 등 테마관광지로 조성하고 넓게 잘 꾸며 놓아서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아늑함과 편안함을 주고 있습니다.

익산 쌍릉 사적 87호

이 능의 주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현재는 백제 무왕과 선화비의 능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마한(馬韓)의 무강왕(武康王)과 그 왕비의 능이라고도 하며, 백제 무왕(武王)과 선화비(善花妃)의 능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도굴된 기사가 있고, 1917년에 학술적인 발굴 조사 결과 그 구조는 원분(圓墳)으로 부여 능산리(陵山里)에 있는 백제 왕릉과 동일 형식에 속하는 판석제 굴식돌방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미 도굴되어 부장품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으나, 당시의 돌방 안에서 비교적 완전한 나무널(木棺)이 출토되어 국립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었는데, 6·25전쟁 중 파손되었다고 합니다.



대왕묘의 돌방 바닥은 봉분 꼭대기에서 7.2m 아래에 있는데, 널방(玄室)규모는 길이 3.80m, 너비 1.78m, 높이 2.27m이다. 남면 중앙에 널길(羨道)이 설치되었는데 널문(羨門)과 널길 입구는 판석을 세워 막았고 4면벽과 바닥·천장을 모두 돌널(板石)로 조립하였다. 바닥 중앙에는 널받침(棺臺)이 놓였다. 소왕묘의 돌방 바닥은 봉분 윗면에서 5.5m 아래에 있는데 돌방의 형식과 석재 등은 대왕묘와 같다. 널방은 길이 3.2m, 너비 1.3m, 높이 1.7m로 규모가 약간 작다. <문화재청 자료>

익산 쌍릉 청주한공 공적비

대왕릉 앞에 세워진 1기의 비가 궁금증을 더하는데 청주한공 한창교 공적비입니다.

역사서와 청주 한씨 족보를 보면 마한 1세 무강왕(애왕) 기준(箕準)왕은 평양에서 27년 재위하고 기원전 194년 위만(衛滿)에게 왕험성을 빼앗긴 후 좌우 궁인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전남 해남(海南)군에 들어가 금마(金馬)군에 도읍을 세우고 마한을 건국한 후 그해 돌아가셨다.

금마군은 지금의 익산으로 백제 때 금마저군(金馬渚郡)이라고도 하였는데 마한의 무강왕에게는 3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둘째인 우량(友諒)이 신라에 입사하여 청주 한씨가 되었기 때문에 이 묘는 무강왕의 묘 즉 청주 한씨(淸州韓氏) 시조의 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주한씨는 국가로부터 쌍릉 주변일대의 토지를 불하받아 조상의 묘역을 성역화하고 공이 많은 사람들의 공적비까지 세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국가에서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백제 무왕릉과 왕비릉으로 표기하고 한씨문중으로부터 다시 토지를 매입하여 묘 앞의 상석과 부속물을 치웠는데 청주한씨가 소송을 걸기도 한 복잡한 사연이 있습니다. 소송결과는 잘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익산쌍릉이 무왕의 묘인지 무강왕의 묘인지 주장하는 사람들마다 정확한 사료가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2가지 주장을 모두 표기해야 하는게 맞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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